책소개

나는 힘이 남아 있는 한 질긴 취재와 다리 품을 팔아서 쓰는 건강하고 싱싱한 소설을 남기고 싶다. 발로 뛰는 과정에서 현장의 벅찬 감동과 숨막히는 긴장감을 수프의 간을 보듯 먼저 맛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취재한 소재를 상상력에다 버무려서 요리하는 과정이 내 성정에는 지겹지 않고 흥미진진한 것이다.



나는 소설가로서 신앙처럼 믿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감동하지 못하고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 소재는 독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독자에게 내 작품을 떠맡기는 식의 강매행위를 하고 싶지 않다.



사실 작가들이 독자는 없다 라고 주장하곤 하는데, 거기에는 독자에게 책임이 있다 라는 독선(獨善)이 깔려 있다. 얼마나 일방통행의 교만한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 독자들은 대단히 겸손한 편이다. 작가가 없다 라고 드러내놓고 불평하는 독자는 아직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한 산사를 거닐고 있었다. 새벽녘의 공기는 청량하였고, 발에 밟히는 젖은 가랑잎은 바스락거리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늦가을 찬 냉기에 날개를 떨며 숲을 못 찾고 이리저리 날고 있는 한 마리 작은 노랑나비를 발견했다.



나는 문득 젖은 가랑잎과 노랑나비를 보면서, 삶의 고통과 번뇌가 인간들에게 오히려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랑잎은 지난 여름의 무성한 꿈을 버린 채 낮은 땅에서 묵언(默言) 중이었고, 노랑나비는 나름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젖은 가랑잎은 봄이 온다는 것을 믿듯 바람결에 다시 어디론가 내려앉았고, 노랑나비 한 마리가 법당으로 날아들어 노란 부처의 이마에 앉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허물벗는 가을산은 이렇게 일갈하였다.



그대여, 깊이깊이 아파하라. 헛꿈에서 깨어나리니.



그렇다. 우리는 진실로 무엇에 혹독하게 아파해 보지 않고 헛꿈에 취해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시간이야말로 헛꿈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작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작은 깨달음도 자신을 헛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탈이라고 생각한다. 불가에서도 꿈에서 깨어난 자를 부처라 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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