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족 이데올로기만 부황하게 떠돌 뿐, 가족은 없다는 작가 조경란의 인식은 도저하다. 그 이데올로기의 늪을 응시하며 그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허황된 인간관계를 서늘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조경란의 섬세한 눈길과 글길은 비판과 해체에서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관계 형성의 진정한 가능성을 탐문해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조경란이 보여준 <타자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진실한 가능성이다. - 우찬제 / 문학평론가



<맛보기>



이런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 여자는 애인이 떠나간 다음에 마지막으로 함께 사용했던 침구를 걷어 세탁하지 않은 채 장 속에 넣어두었다. 여자는 가끔 그걸 꺼내 애인의 머리카락과 비듬 따위가 없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펼쳐보곤 하였다. 침대 시트에는 정액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여자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삽살개가 앉아 있는 모습을 한 그리 크지 않은 점이었다고 했다. 바로 옆에는 커다란 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자국의 윤곽은 먼젓번 것보다 좀더 흐려서 관찰할 때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다. 아직도 여자는 떠나간 애인을 기다리면서 가끔씩 그 침구를 꺼내보곤 할까. 불현듯 그 여자가 떠올랐다. 달력 때문이었나. 그 여자는 오래전 나의 가까운 친구였다. 아니다. 여자의 이야기는 멀고 먼 이국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같은 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탁상용 달력을 납작하게 접다가 달력 앞장에 씌여진 이름을 발견했다. <정원에게, 천구백구십칠년 십이월.> 왼쪽으로 약간 기우듬하게 누운 글씨체로 달력을 건네 받았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문득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면 여지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져버리곤 하던 그의 어깨 기울기가 떠올랐다. 날짜가 박힌 달력 뒷면에는 마티스의 그림들이 인쇄되어 있다. 달력을 넘겨 오월의 뒷면을 보았다. 오월 그림의 제목은 <한 여자>이다. 옆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 달력을 접어 도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짐작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의 책상 위에도 내 것과 똑같은 달력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나는 달력의 빈 여백에다 사람들과의 약속장소와 시간, 생일 따위들을 기록해두곤 한다. 그의 달력에는 어떤 메모가 씌여져 있을까. 나는 그런 것들을 한번도 궁금해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무엇을 기록하고 있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달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려다말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기습적인 현기증이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부터 부쩍 현기증이 자주

저자소개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