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천줄읽기
1891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일부 언론들은 “쓰이지 않는 게 나았을 책”, “부도덕하고 불결한 책”이라고 비난했다. 작가 오스카 와드는 예술과 도덕은 별개이므로 도덕적 시각에서 작품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 문제로 인해 그의 부도덕한 삶이 여실히 반영된 것으로 간주되어, 스캔들과 치욕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되었다. 와일드는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나 사후 차차 그 작품성을 평가받으면서 1970년대 이후에는 진지하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와일드가 가볍고 대중적인 작품을 쓴 그저 그런 작가였는지, 지나치게 현대적인 사상을 개진했던 불우한 사상가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은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다. 작가를 대변하는 헨리 워턴 경은 새로운 쾌락주의를 주창하면서 영국 보수층의 종교적·윤리적 위선을 공격하고 풍자한다. 헨리 경은 예술의 이상 또는 화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도리언에게 인생에서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이며, 순간의 감각이 중요하기 때문에 열정을 갖고 모든 감각을 체험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이 도리언에게 끼치는 좋지 못한 영향은 작가가 작중 인물 헨리 경에게 보이는 공감과 비판의 양면적 태도를 잘 보여 준다.
뛰어난 구술가이자 당대를 호위한 유미주의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와일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다른 유명 작가, 예를 들면 예이츠나 버나드 쇼 등과 마찬가지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즉 자못 엄격해 보이는 도덕주의, 위선적인 진지함과 엄숙함이 대중의 삶을 억누르던 시대에 와일드는 내면의 개인주의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본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외양으로도, 그리도 작품으로도 드러났다. 젊은 시인인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한바탕 동성애 사건뿐만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검은색과 회색 옷만을 걸치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치렁치렁 길게 기르고 단춧구멍에는 초록색 꽃을 꽂고 다녔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상류층과 어울리면서도 그가 내적으로 추구한 것은 결국 〈멋〉 아니면 〈미(美)〉였다. 그는 뛰어난 구술사로 수많은 경구가 가득한 희곡을 남겼고, 강연에도 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시인인 어머니와 유명한 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유미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888년 단편집 『행복한 왕자』를 발표했고,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2년에는 단편집 『석류나무 집』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 당시 격론을 일으켰으며, 특히 『행복한 왕자』는 19세기 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에 사랑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으로, 비평가 월터 페이터로부터 동화 중의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독설과 위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희곡으로 극작가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893년에는 비극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옥중기』를 썼다. 1897년에 출옥하여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
와일드의 명예는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회복되었으며, 이후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옮긴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