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뉴욕 한복판에서 남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어처구니

없이 순결을 짓밟히고 계속 상채기를 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처녀성보다는 임신에의 공포, 일류여

자대학 출신이라는 체면이 뉴욕 5번가의 허름한 아파

트 침대에서 무참하게 구겨지고 만다. 동물처럼 쉴새

없이 쫓겨야 하는 연연…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한 가

정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신으로 체감하

면서도 일상의 톤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언니

은조… 넘치는 정염 때문에 소설의 사실부분을 꿈으로

치환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이 작가의 초기 작품군들에

비하면 이런 차분한 호흡은 놀라울 지경이다. 그만큼

연륜의 힘과 지혜가 표출된 작품이다. 정염의 작가 김

지원이 그 정염을 四季로 확산시키면서 수놓듯 한 땀

씩 엮어가는 최초의 장편소설!





<맛보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념한 밀가루 반죽을 파

위에다 골고루 뿌린 다음 앞뒤를 노룻노릇하게 지져서

접시에 얌전히 담는다. 연연은 요리책을 읽다가 웃는

다. 마지막에 씌인, 얌전히 담는다는 부분은 너무 친

절하다 싶다. 요리책을 읽으니까 배가 고파진다. 연연

은 앉았던 식탁의자로부터 허리를 길게 뻗어 수저통에

서 젓가락 두 짝을 꺼낸다. 혼자 먹을 때는 대개 젓가

락만 쓴다. 설겆이일을 줄이려는 무의식의 노력이다.



빗겨가는 가을의 오후 햇살이 부엌창 밖으로 보인

다. 부엌은 햇빛이 드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앞을

막는 건물도 없어 전등을 켜 둘 만큼 어둡지는 않다.

늘 그늘같이 서늘한 빛깔이다.



젓가락은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길게 펴서 꺼냈지만

밥그릇을 가지러 가려면 일어나야 한다. 그만 게으름

을 부리고 연연은 일어난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쓸쓸

하다. 쓸쓸함은 연연의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연연

이 움직이면 여기여기 하고 달려드는 것 같다. 너 주

위는 쓸쓸함이니라, 하염없음이니라 한다.



밥을 푸려고 밥솥 뚜껑을 연다. 물에 퉁퉁 불은 생

쌀이 그대로 있다. 스위치를 안눌렀나 보다. 종종 그

런다. 어떤 때는 언니와 형부가 밥을 먹으려고 둘러

앉았는데 막상 밥이 안된 때가 있었다. 연연은 전기밥

솥의 스위치를 누른다.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소켓트 탓인가, 연연은 소켓트를 한 번 뺐다가 다시

꽃아 본다. 역시 무반응이다. 일어나서 부엌 전등 스

위치를 올려 본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배반당한

것 같다. 두꺼비집이 고장인가, 수퍼를 불러야 하나,

그 일이 귀찮다. 미를 수만 있다면 미루겠고 조금만

전기 상식이 있다면 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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