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늦가을 찬비는 방정을 떨어 째는 바람결에 따라 이리저리 허옇게 뒤집히곤 했다.



그나마 잎이 좀 남아 있던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이제 빈손들만 치켜든 채 몸을 떨고 서 있었다. 그 밑에는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낡은 천처럼 떨어진 나뭇잎들이 널려 있었다.



박일우는, 살 대만 남은 비닐우산을 쓰고 비바람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으로 빗줄기들이 희게 뒤집힐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미스 구가 큰길로 나가는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그녀는 우산을 받고 있어서, 밝은 갈색 코트의 아랫자락과 그 밑으로 드러난 두 다리, 그리고 굽이 높은 검정 구두만 보였다. 빨강 바탕에 녹색의 둥근 점들이 무늬 진 우산을 받은 그녀가 빗물이 질펀한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 모습은, 물 위를 떠가는 큰 버섯처럼 보였다.



그는 미스 구의 허리께부터 머리까지가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를 쉽게 알아보았다. 우산의 색깔과 무늬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입고 있는 밝은 갈색의 코트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7년여를 눈에 익혀 온 그녀의 모습이었다. 어떤 특징으로써가 아닌 윤곽에서 오는 느낌으로써였다.



미스 구는 조퇴를 했다.



조금 전 그녀는 그에게 와서, 오후에 일찍 좀 나갔으면 해서요……, 하고 말꼬리를 늘이고 서 있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얼굴이 꺼칠해 보였다.



몸은 괜찮고? 라는 물음이 앞서 나오려고 하는 것을 눌러 놓고, 왜 무슨 일이 있어? 하고 물었다.



시흥에 가 보려고요. 오늘도 안 나오셨어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급한 일이 없으면 그렇게 하지. 오늘도 안 나왔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도 청소부 아주머니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 나오지 않은 기간이 대충 보름은 된 것 같았다.



청소부 아주머니네가 전화를 놓고 살 형편이 아니어서 직접 사람이 가지 않으면 사정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사정은 미스 구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설혹 사정이 허락된다고 해도 시중에서 백여 만 원씩을 치르고 백색 전화를 살 형편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전화국에 청색 전화를 신청하게 된다면 2년쯤은 기다려야 겨우 차례가 돌아올 둥 말 둥이었다.



박일우의 눈길은 미스 구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다. 그가 서 있는 창가에서는 한길의 건너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든지, 아니면 택시를 탔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자주적인 역사의 흐름을 억압하는 권력을, 베트남 전쟁과 한국의 80년대 운동을 겪은 주인공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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